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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높은 사유를 위하여

오정환 2024-04-07 조회수 92

'악의 평범성'은 사유하지 않은 결과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범죄 피의자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을 때 우리는 놀란다. 속은 몰라도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흉악범이라는 사실에 혀를 찬다. 자신의 입으로 유대인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고 시인한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도 그랬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유대인을 유럽 전역에서 색출하여  아이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아이히만은 머리에 뿔이 난 악마의 형상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냥 평범한 이웃이었다. 책임감 있게 임무를 수행하고, 법을 준수했으며. 공무원으로서 상부 지시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에 놀랐다. 잔인한 범죄자들이라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히만 같은 평범한 사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뭘까?  안나 아렌트는 '사유의 부재'라고 진단했다. 상부 명령을 이행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사유하지 않은 인간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행렬털애벌레 같은 사람들

  행렬털애벌레(Pine processionary caterpillar)가 있다. 들판이나 도심공원에서 흔하게 보는 벌레다. 이름에서 눈치챘듯이 이 벌레는 긴 줄을 일렬로 기어간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앞 벌레가 가니까 뒤에 있는 벌레는 따라가는 것이다.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¹에는 곤충학자 파브르가 행렬털애벌레를 관찰한 이야기가 나온다.


   행렬털애벌레는 독특한 행동 습성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녀석은 먹이를 찾으러 보금자리를 나설 때 마치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줄로 이동한다. 선두 애벌레는 기어가면서 가느다란 실을 뽑아 흔적을 남긴다. 다음 애벌레는 그 실을 따라 기어가면서 자기 실을 한 줄 덧붙인다. 수백 마리 애벌레가 줄줄이 대형을 이루며 숲을 통과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선두 애벌레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점은 없다. 어쩌다 보니 선두에 섰을 뿐이다. 선두 애벌레는 한참 기어가다 가끔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가장 가까운 먹잇감이 어느 쪽에 있을지 감을 잡은 후 행진을 계속한다. 선두 애벌레를 치워보면 두 번째 애벌레가 정찰 임무를 넘겨받는다. 뒤따르는 애벌레는 선두의 변화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현대 곤충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앙리 파브르(Jean Henri Fabre)는 행렬털애벌레를 연구하다가 선두를 따르려는 애벌레의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고픈 호기심이 생겼다. 1896년 1월 30일, 파브르는 한 가지 실험을 구상했다. 줄줄이 행진하는 애벌레를 유인해 흙을 채운 커다란 항아리의 테두리를 따라 빙글빙글 돌게 한 것이다. 그는 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애벌레들이 기어오르자마자 나머지는 쓸어냈다. 그런 다음 선두를 살짝 건드려 마지막으로 따라오던 애벌레의 꽁무니를 뒤따르게 해서 원을 완성시켰다.

 

   그 순간 선두가 없어졌다. 어떻게 됐을까? 원 안의 애벌레 각각은 앞서가는 애벌레가 만든 실을 따르기만 했다. 원에서 약 30센티미터 거리에 애벌레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를 놓아두었는데도 이를 못 보고 지나쳤다. 엿새 뒤인 2월 5일, 애벌레들은 여전히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다수가 지치고 굶주려 나가떨어지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원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기력이 남은 몇 마리만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다.

 

   파브르의 계산에 따르면 애벌레들은 항아리를 500바퀴 이상 돌았고 이동 거리는 400 미터를 넘겼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약 145킬로미터, 즉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않고 3.5번의 마라톤을 완주한 것과 맞먹는 여정이었다. 파브르는 이렇게 말한다.. "애벌레들은 지치고 배고프고 쉬지도 못하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도 수백 번 지나간 실크 띠에 고집스럽게 매달린다.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할 희미한 논리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행렬털애벌레 이야기를 읽으며 살짝 웃음이 나왔는가? 참 재미있는 벌레가 다 있군 하고 생각했는가? 그래서 당신 어떤 모습인가? 남이 하던 대로 유행을 좇지 않았는가. 남들이 한다면 생각 없이 따라 하지 않았는가.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적은 없는가.  근거도 없는 동영상을 사실로 믿고 여기저기 퍼나르지 않았는가. 미안하지만 당신이 행렬털애벌레다. 떠다니는 소문을 비판하고 분석할 논리력이 없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다. 


 독서는 수준 높은 사유의 시작

  사유는 인간만이 보유한 능력이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영혼 없는 인간이다. 행렬털애벌레 같은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사유를 시작해야 할까? 지금부터 생각 좀 하고 살아야지, 생각 좀 해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수준 높은 사유가 될까? 천만의 말씀. 사유의 수준을 높이려면 독서해야 한다. 독서는 어떻게 수준 높은 사유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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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¹(팀허슨 지음, 강유리 옮김,  현대지성,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