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은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으로 바꾼 인물이다. 다산이 유배를 간 1801년은 그의 나이 41세 때다. 이전까지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노론 세력들은 정조 시대에 득세한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그런 와중에 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됐다. 정약용에겐 너무 어이없고 억울한 일이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란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중국 연경에 있는 주교에게 탄원서를 써서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세력들을 축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노론 세력들은 억지로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끼워 넣은 것이다. 이 당시 천주교 박해로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정약용은 18년 동안 긴긴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언제 사약을 받을지 모르는 두려움, 계속되는 감시와 박해 속에서 그는 6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다. 그의 연구 업적이 어떠한지 정민 교수는『다산 선생 지식영영법』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다산의 작업 과정을 훔쳐보면서, 그의 사고가 너무나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데 놀랐다. 나만 놀란 것이 아니라, 그가 20여 년 만에 자신의 성과를 들고 귀양지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당대의 학자들도 놀랐다.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¹
다음은 다산이 한 말이다.
‘나는 바닷가 강진 땅에 귀양을 왔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었지만 스무 해 동안 세상길에 잠겨 선왕의 큰 도리를 다시 알지 못했더니 이제야 여가를 얻었구나. 그러고는 마침내 흔연히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육경과 사서를 가져다가 골똘히 연구하였다. (중략)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주신 복이 아니겠는가?’
그의 성과는 대부분 18년간 강진 유배 생활 고초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한 사람이 뜻을 세워 몰두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실천해 보였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바닥에서 떼지 않았던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치아와 머리카락도 다 빠졌다.
20년 가까운 오랜 귀양살이는 다산 개인에게는 절망이었으되, 조선 학술계를 위해서는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었다.²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만약 그가 인생을 자포자기하고 허송세월로 시름을 달랬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
1.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정민, 김영사, 2006. 19쪽
2. 앞의 책 19쪽